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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서양인이 냄새라고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냄새가 있다. 바로 깨끗함의 냄새다. 화이트 머스크, 알데하이드, 면직물에 남은 세제의 화학적 잔향, 갓 연 건조기 문에서 느껴지는 오존 특유의 산뜻함. 파리나 시카고의 누군가에게 "깨끗한 냄새"가 무엇인지 물으면, 이름은 모르면서도 이런 분자들을 묘사할 것이다. "중립적인 냄새"가 무엇인지 물어도 같은 것을 설명할 것이다. 그들은 문화적 산물을 부재와 혼동해 왔다.
이는 사소한 혼동이 아니다. 서양 후각 문화의 근본적인 오류이며, 지난 한 세기 넘게 세계 향수 산업을 형성해 온 오류다. 청결에는 특정한 향이 있고, 제대로 관리된 인간의 몸은 합성 머스크와 세탁 화학물질 같은 냄새가 나야 한다는 생각은 고대의 것도, 보편적인 것도, 필연적인 것도 아니다. 그것은 산업 자본주의와 개신교 신학, 그리고 인류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마케팅 캠페인 중 하나가 만들어 낸 산물이다.
비누 이전의 몸
기록된 인류 역사의 대부분 동안 인간의 몸은 인간의 몸 같은 냄새가 났다. 이는 문제로 여겨지지 않았다. 고대 로마는 오일과 때밀이, 공동 목욕을 중심으로 정교한 목욕 문화를 발전시켰지만, 목적은 냄새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즐거움이었다. 목욕 후 향유를 바른 것은 자신의 자연스러운 냄새를 대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냄새에 무언가를 더하기 위해서였다. 여전히 피부 냄새가 나는 몸 위에 장미나 사프란의 층을 얹는 식이었다.
중세 유럽은 대중적인 통념과 달리 한결같이 더럽지는 않았다. 그러나 몸의 자연스러운 냄새와 맺는 관계는 오늘날과 질적으로 달랐다. 사람의 냄새는 그 사람의 일부로 이해되었다. 의학 이론에 따르면 의사들이 halitus라고 부른 개인의 체취에는 진단 정보가 담겨 있었다. 달콤한 냄새는 건강을, 날카로운 냄새는 질병을 나타낼 수 있었다. 냄새는 불쾌함이 아니라 데이터였다.
몸은 후각적 불안의 장소가 아니었다. 그런 불안은 만들어 내야 했다.
개신교의 코
깨끗함 숭배의 첫 번째 전제 조건은 신학이었다. 종교개혁, 더 정확히는 북유럽과 북아메리카를 지배하게 된 칼뱅주의와 청교도주의의 흐름은 몸을 도덕적 의심의 장소로 재구성했다. 육체는 타락해 있었다. 육체의 분비물은 그 타락한 상태의 증거였다. 몸처럼 냄새가 난다는 것은 반쯤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동물적 본성을 광고하는 일이었다.
이는 후각 교리로 명시되지는 않았다. 아무도 체취의 죄악성을 논하는 논문을 쓰지 않았다. 하지만 감각의 변화는 분명했다. 18세기에 이르러 영국, 네덜란드, 독일 제후국의 부르주아 계층은 자신들이 Gestank, 즉 악취라고 부르던 것에 뚜렷한 민감성을 보이기 시작했다. 지중해와 동유럽의 동시대인들이 공유하지 않았던 감각이었다. 두 세기에 걸친 칼뱅주의적 불안에 훈련된 영국인의 코는 체취를 도덕적 실패로 읽기 시작했다.
이것이 "깨끗함"의 깊은 문법이다. 최초의 비누가 대량생산되기 전부터 문화적 기반은 이미 갖춰져 있었다. 몸은 냄새를 풍기며, 그 냄새는 문제라는 기반이었다.
비누의 산업적 순간
비누 자체는 고대부터 존재했다. 바빌로니아인도 만들었고, 갈리아인도 만들었다. 하지만 수천 년 동안 비누는 소량 생산되는 사치품이었으며, 주로 직물 가공에 사용되고 가끔 손을 씻는 데 쓰였다. 비누가 장인 제품에서 산업적 필수품으로 변모한 것은 세 가지 발전이 동시에 일어난 19세기 중반이었다.
첫째는 세균설이었다. 1860년대와 1870년대에 루이 파스퇴르와 로베르트 코흐는 독립적으로 감염의 미생물학적 기반을 확립했다. 그들의 발견은 이전까지 단순한 부르주아적 깔끔함에 불과했던 것에 과학적 권위를 부여했다. 이제 씻지 않은 몸은 단지 불쾌한 것이 아니라 위험한 것이 되었다. 씻지 않은 몸에는 보이지 않는 살인자가 숨어 있었다. 엄밀히 말하면 이는 세균설을 과도하게 확장한 것이었다. 체취와 병원성 세균은 대체로 서로 무관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사적으로는 거부하기 어려웠다.
둘째는 산업 화학이었다. 니콜라 르블랑의 공정(1791년 특허 취득)과 이후 에르네스트 솔베의 개선된 공정(1860년대 개발)은 탄산나트륨을 저렴하고 풍부하게 만들었다. 1880년대에 이르러 비누는 산업적 규모로 개당 몇 푼에 생산될 수 있었다. 사치품이었던 것은 상품이 되었고, 곧 필수품이 되었다.
셋째는 광고였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비누 회사들은 수없이 많았고 치열하게 경쟁했으며, 단순히 제품만 판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불안을 팔았다. 새롭게 등장한 대중 유통 잡지를 가득 채운 광고는 사회적 재앙의 전후 상황을 묘사했다. 남편이 외면하는 여성, 반 친구들에게 거부당하는 아이, 승진에서 밀려나는 노동자. 메시지는 "비누는 기분 좋다"가 아니었다. "비누가 없으면 당신은 사회적 따돌림을 당한다"였다.
비누의 화학적 냄새, 즉 잿물로 비누화한 우지에 합성 꽃 향을 입히거나, 강렬한 알칼리성 그대로 둔 냄새는 수많은 냄새 중 하나로 문화에 들어온 것이 아니라 사회적 수용 그 자체의 냄새로 자리 잡았다.
화이트 머스크와 세탁소의 숭고함
서양 후각을 깨끗함이 식민화한 다음 단계는 20세기 중반 합성 머스크의 부상과 함께 찾아왔다. 사향노루의 분비샘에서 얻거나 앰브레트 같은 식물에서 얻는 천연 머스크는 따뜻하고 동물적인 소재로, 명백한 성적 뉘앙스를 지닌다. 1950년대 이후 개발된 합성 머스크는 동물성을 벗겨 내고 확산성만 남겼다. 그 결과 "피부"로 인식되지만 "몸"으로는 인식되지 않는 분자가 탄생했다.
향수 산업이 이 합성물 계열을 부르게 된 화이트 머스크는 깨끗함 미학의 중추가 되었다. 자연계의 어떤 것과도 닮지 않은 냄새였다. 이상화된 몸의 냄새, 따뜻하지만 땀 냄새는 없고, 존재하지만 방해하지 않으며, 친밀하지만 성적이지 않은 몸의 냄새였다. 다시 말해 그것은 개신교적 자본주의가 300년 동안 만들어 내고자 했던 몸의 냄새였다. 생산적이고, 통제되어 있으며, 불쾌감을 주지 않는 몸.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섬유유연제와 세탁세제가 함께 발전하면서 이 등식은 더욱 굳어졌다. 세탁물에 감지 가능한 향을 남겨 효능을 알릴 필요가 있었던 이 제품들은 화이트 머스크를 주요 후각적 표지로 채택했다. 한 세대가 지나자 합성 머스크의 냄새는 깨끗한 세탁물의 냄새와 구별할 수 없게 되었고, 깨끗한 세탁물은 청결 그 자체와 구별할 수 없게 되었다.
이때 제조된 냄새가 보이지 않게 되었다. 어떤 냄새가 충분히 보편적이고, 일관되며, 도덕적 미덕과 긴밀하게 연결되면 더 이상 냄새로 인식되지 않는다. 그것은 기준점이 된다. 영점이 된다. 깨끗함의 냄새는 냄새가 없는 냄새이며, 물론 그것은 매우 구체적인 냄새다.
다른 세계의 코
서양의 깨끗함 이상이 얼마나 편협한지 알려면 다른 곳을 바라보기만 하면 된다.
아라비아반도와 더 넓은 걸프 지역의 지배적인 후각 전통은 우드, 앰버, 장미, 사프란을 중심으로 한다. 따뜻하고 수지성이며 오래 지속되고, 존재감이 뚜렷한 소재들이다. 리야드나 두바이에서 향이 잘 밴 사람은 냄새의 부재처럼 냄새 나는 사람이 아니다. 방 안을 가득 채우는 사람이다. 향이 나는 나무 조각과 수지를 태워 몸과 집에 향을 입히는 바쿠르 관습은 서양에 대응하는 것이 없다. 체취를 없애려는 것이 아니다. 체취 위에 무언가 장대한 것을 쌓으려는 것이다.
일본의 후각 전통은 전혀 다른 원리로 작동한다. 향을 피우는 방식인 고도는 관심과 섬세함을 실천하는 방식으로, 형식적 기원은 무로마치 시대(14세기에서 16세기)에 두고 있으며, 그 뿌리는 6세기 어느 맹인 승려의 화물칸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선호되는 소재인 침향, 샌들우드, 은은한 장뇌는 바로 그 조용함 때문에 높이 평가된다. 하지만 이는 서양식 깨끗함의 고요함이 아니다. 종이 위의 붓질 하나가 지닌 고요함이다. 부재가 아니라 긍정적인 미학이다. 일본인의 코는 냄새를 없애려 하지 않고, 거의 침묵에 가까운 무언가로 다듬으려 한다.
인도의 아타르 전통은 에센셜 오일을 샌들우드 베이스에 증류해 풍부하고 복합적이며 피부에 직접 바르는 향을 만들어 낸다. 가장 귀하게 여겨지는 아타르에는 흙내음이 있는데, 화이트 머스크와 알데하이드에 훈련된 서양인의 코는 이를 처음에 "더럽다"고 받아들일 수 있다. 이는 아타르의 실패가 아니라 후각적 문해력의 실패다.
어떤 문화의 코가 다른 문화보다 낫다는 말이 아니다. "깨끗함"은 보편적인 언어가 아니라 하나의 방언이라는 뜻이다. 합성 머스크, 알데하이드, 세탁 화학물질로 이루어진 자신들의 특정한 조합이 후각적 존재의 중립 상태를 나타낸다는 서양의 가정은 과학적 주장으로 위장한 식민주의적 주장이다.
알데하이드와 부재의 구조
서양식 깨끗함의 이상을 구축하는 데 알데하이드가 한 역할은 특별한 주목을 받을 만하다. 날카롭고 금속성인, 비누 같거나 왁스 같은 인상을 만들어 내는 유기 화합물인 알데하이드는 20세기 초에 향수에 처음 사용되었다. 그 효과는 독특하다. 공기가 떠오르고, 밝아지고, 갓 문질러 닦인 듯한 느낌을 만든다. 동시에 거리감도 만든다. 알데하이드 향은 착용자를 팔 하나 거리만큼 떨어뜨려 둔다. "나는 여기 있지만 흐트러지지 않았다"고 말한다.
이는 우연이 아니다. 알데하이드는 서양 부르주아 계층이 후각적 자기 절제라는 프로젝트를 완성해 가던 바로 그 역사적 순간에 향수에 들어왔다. 깨끗하고 날카로우며 추상적인 알데하이드의 냄새는 천박함 없이 부를 드러내고, 침범하지 않으면서 존재감을 보이며, 몸 없이 몸을 나타내고 싶어 했던 계층의 사회적 열망에 정확히 들어맞았다.
20세기의 상당 기간 동안 알데하이드 플로럴은 서양에서 가장 지배적인 고급 향수 형식이었다. 그 메시지는 늘 같았다. 착용자는 동물을 초월했다. 착용자는 세탁되었다. 착용자는 통제되고 있다.
프레시의 전환
1990년대에는 서양식 깨끗함의 구체적인 성격에 변화가 일어났지만, 그 밑바탕의 논리는 변하지 않았다. 수십 년 동안 지배적이었던 알데하이드 플로럴은 새로운 계열인 아쿠아틱에 자리를 내주었다. 바닷물보라, 오이, 비, 멜론, 젖은 돌을 연상시키는 합성 분자를 바탕으로 한 1990년대와 2000년대의 아쿠아틱 향수는 깨끗함의 이념을 새로운 영역으로 확장했다.
알데하이드가 가정의 질서, 비누, 세탁물, 잘 관리된 집을 나타냈다면 아쿠아틱은 더 거대한 야망을 나타냈다. 자연 그 자체를 위생적인 공간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바다, 폭포, 아침 이슬. 실제 바닷물에서 소금물과 부패와 생선 냄새가 난다는 사실은 신경 쓰지 말자. 비가 포장도로에 떨어질 때 토양 박테리아가 만들어 낸 화합물인 페트리코르를 방출한다는 사실도 신경 쓰지 말자. 아쿠아틱 향수는 자연을 묘사한 것이 아니었다. 세탁된 자연이라면 어떤 냄새가 날지를 묘사했다.
이것이 깨끗함의 마지막 수였다. 공장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지구에서 나온 것처럼 보일 때까지 스스로를 자연화하는 것. 아쿠아틱 향수를 뿌린 사람은 "프레시"한 냄새가 난다. 고정된 지시 대상은 없지만 모든 서양인의 코가 즉시 알아듣는 단어다. 무엇처럼 프레시한가? 특별히 무엇과도 같지 않다. 불쾌한 모든 것이 부재한 것처럼. 문화적 이상이 화학물질이 되어 귀 뒤에 발린 것처럼.
깨끗함의 대가
깨끗함의 이상이 지배하면서 향수 예술 자체에도 결과가 따랐다. 하나의 후각적 영역이 기본값의 지위로 올라가면 다른 모든 영역은 암묵적으로 강등된다. 수 세기 동안 향수의 중심이었던 동물성 소재들, 시벳, 캐스토리움, 앰버그리스, 천연 머스크는 점차 주변부로 밀려나거나 규제되거나, 따뜻함은 유지하되 퀴퀴한 야생성은 버린 합성 대체물로 바뀌었다.
그 결과 후각적 역동 범위의 상당 부분을 잃은 후각 문화가 생겨났다. 깨끗한 음색으로만 말할 수 있는 문화는 복잡성을 예의범절과 맞바꾼 문화다. 마치 문명 전체가 옷에 허용되는 색은 베이지뿐이라고 결정한 뒤, 자신의 좋은 취향을 자축하는 것과 같다.
현대 향수에서 가장 흥미로운 작업은 이런 평탄화에 저항한다. 연기, 가죽, 땀, 흙, 발효, 부패를 전면에 내세우는 조합은 단순한 도발이 아니다. 깨끗함이라는 산업 복합체가 절단해 낸 후각 표현의 전체 스펙트럼을 되찾으려는 시도다.
깨끗함 너머를 맡기
후각적 자유를 향한 첫 단계는 깨끗함이 중립적 지반이 아니라 하나의 입장임을 인식하는 것이다. 화이트 머스크와 세제와 합성 오존의 냄새가 우드, 인센스, 아타르만큼이나 구체적이고 구성된 문화적 산물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누군가에게서 "너무 많은" 냄새, 너무 많은 향신료, 너무 많은 달콤함, 너무 많은 몸의 냄새를 맡을 때 우리가 느끼는 불안은 미적 판단이 아니라 문화적 반사작용이며, 그 반사작용에는 추적 가능한 역사적 기원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두 번째 단계는 더 어렵다. 깨끗함이라는 필터 없이 냄새 맡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앰버를 만나고도 "무겁다"고 번역하지 않는 것. 동물성 노트를 만나고도 "더럽다"고 번역하지 않는 것. 풍부함을 만나고도 "너무 많다"고 번역하지 않는 것. 이런 번역은 자동으로 일어난다. 한 세기의 비누 광고와 화이트 머스크가 서양인의 코에 심어 놓은 것이며, 그것을 무시하려면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깨끗함을 버려야 한다는 도덕적 명령은 없다. 그것은 유효한 미학이다. 하지만 미학의 하나일 뿐이며, 수십 개 방언 중 하나일 뿐이다. 그것을 선택하는 것이 실수가 아니다. 실수는 그것이 애초에 선택이 아니었다고 믿는 것이다.
우리가 중립적이라고 여기는 공기가 방 안에서 가장 강한 의견을 낸다.